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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

매일 보고 싶은 남자가 생겨서 결혼했는데, 남편의 업무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나고 있다. 신혼 생이별은 둘을 더 애틋하게 만들어줄 수... 있기는 개뿔, 그냥 보고 싶다. 유부녀가 아니라 자취생이 된 기분으로 주말을 보냈다. 근데 나름... 좋네...?

지난 금요일에는 남편 휴무라 재택근무를 하며 하루종일 같이 있었다. 저번에 바선생 글을 올린 이후 몇 주 뒤, 어둠 속에서 다른 바선생을 한 번 더 조우한 것 같았다. '같았다'고 쓴 이유는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불을 켜지 않은 작은 방에서 '이제 불도 안 켜고 물건을 꺼낼 정도로 바선생이 무섭지 않군'하며 스스로를 대견해하던 순간, 서랍장 안에서 무언가 작은 게 호로록 올라왔다가 후루룩 사라지는 잔상을 보았다. 비명을 지르며 운동복을 내던졌지만 내가 진짜로 목격한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 겁에 질렸다. 검은 점만 봐도 무섭고 집안 어딘가에서 소리만 나도 흠칫했다. 이렇게 살다간 신경쇠약에 걸릴 거 같아서 세스코를 예약했다. 그 세스코 무료진단이 금요일이었다.

세스코 선생님은 보기에도 믿음직스러웠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싱크대 하부를 뜯어 열더니(저기가 열리는 구역인지도 몰랐다) 순식간에 바퀴벌레 알집을 찾아냈다. 이전부터 있던 것인지 우리가 이사 온 후 생긴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단숨에 계약을 맺게 하기엔 충분했다. 초기 관리를 포함한 6개월 관리는 45만 6천 원이었다. 총 네 번 방문에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세스코 선생님은 해충의 현 상태를 확인한다며 트랩을 여기저기 설치한 후 퇴치제를 분사하고 떠났다.

그날 이후 나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밤에 혼자 잠도 잘 자고 검은 점을 봐도 놀라지 않았다. 아직 실제로 실시한 건 거의 없지만 그냥 무척 마음이 놓였다. 심신안정에 쓰인 비용이라고 생각하니 가격도 별로 비싸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만족스러운 소비였다.

어제는 오랜만에 혼자 미술관에 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갔는데 갑자기 비도 오고 바람도 많이 불고 사람도 너무 많았다. 나는 영상관에서 상영하는 이스라엘 영화를 예약해 뒀는데 보는 내내 꿀잠을 잤다. 같이 간 사람이 없으니 억지로 잠을 참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 수문 개방하듯 잠이 쏟아졌다. 다 보고(자고) 났더니 너무 피곤해서 전시는 보지도 않고 그냥 집에 왔다. 헬스장도 갈까 했는데 너무너무 졸려서 다 때려치고 세스코가 관리해 주는 안락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아침 7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주말에는 왜 항상 평일보다 일찍 눈이 떠지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이른 아침을 시작했더니 하루가 길다. 방금 전까지는 결혼식 사진으로 셀프 앨범을 만들었는데, 최고사양으로 올렸더니 다섯 권에 세스코 관리비와 비슷한 금액이 나왔다. 좀 놀라서 일단 두 권만 주문했다. 그래도 사진 찍은 곳에서 앨범을 만들면 한 장 추가에 33,000원이랬다. 웨딩택스 너무 무섭다. 사진 4장 추가할 돈으로 36장짜리 앨범 두 권이 나왔으니 나름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사진 보정도 포토샵으로 직접 했는데 나중엔 하다 지쳐서 그냥 웬만한 건 그대로 뒀다. 피부도 하나하나 다 만지고 싶었는데 흐린 눈으로 넘겼다. 중간엔 사설 보정업체 단가도 찾아봤는데 내가 고른 사진은 136장... 조용히 포토샵을 켰다. 라이트룸으로 색감까지 잡으려 했으나 사치라서 역시 그냥 넘겼다. 사진 작업을 하면서 <마이데몬> 엔딩까지 다 봤다. 10화까지 보다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 이탈했었는데 작업하며 심심해서 그냥 틀었다. 이렇게 재미가 없는데 결말은 궁금하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는 16화 내내 클리셰 범벅이었지만, 같은 클리셰도 맛있게 재탕하면 인기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줬다. '맛있게'가 어려운 거겠지. 송강과 김유정의 외모는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나는 본편보다 전생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고 절절했는데, 전생 역시 클리셰였다.  그치만 뭐랄까, 양반과 기생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란 건 너무나 많이 쓰이는 소재지만 나는 이 드라마에서야 처음으로 그 벽을 느꼈다. "저 아가씨는 어느 양반집 규수인가?" "양반집 규수는 아니고, 기생입니다." "... 그래?" 송강의 몹시 실망하는 표정에서 아 이게 신분의 벽이라는 거구나 몸소 체감했다. 처음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신분제도 아니고 그냥 그런갑다~ 했는데 송강의 실망하는 기색을 보는 순간, 저 둘은 이뤄질 수 없는 운명이구나 라는 게 확 와닿았다. 왜지? 그냥 송강이 설득력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