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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순천 여행기

송광사에 가고 싶었는데 대중교통으로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순천시에는 '두근두근 순천 여행'이라는 시티투어 패키지가 있었다. 내가 방문을 희망하는 송광사도 '송광사 투어'라는 이름으로 매주 수, 토요일에 운행하고 있었다. 신이 나서 바로 그 주 토요일로 예약을 걸었다. 최소 인원 5명이 되어야 출발 가능하다는 문구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주말인데 설마 모객이 안 되겠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토요일 오전에 출발하는 KTX가 매진이라서 금요일 오후 8시 표를 예매해 뒀는데 "선생님, 죄송하지만 모객이 미달되어 송광사 투어 운행이 어렵습니다"라는 전화를 금요일 오후 6시에 받았다. 이미 숙소까지 예약을 해뒀던 터라 황망한 마음을 감출 길 없이 KTX에 올랐다.

금요일 밤 10시 40분, 나는 순천역에 도착했다. 내가 지리를 정말 몰라서 가는 길에야 지도를 봤는데, 순천은 정말 멀리 있었다. 어쩐지 KTX에서 참을 수 없이 지루했던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는 세상 친절했고 너무나 깔끔했다. 건물은 레드닷 어워즈 수상까지 했다는 액자가 걸려 있어서 어쩐지 더 믿음직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도미토리는 모르는 사람과 같은 공간을 써야 하는 거니까 내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조심스러워졌다. 하필 나는 씻으려고 나올 때마다 계속 뭔가를 하나씩 빠트려서 반복적으로 문을 닫았다 열었다. 4인실에 손님은 한 명뿐이었지만 너무 미안했다. 다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개별 커튼이 있어서 굉장히 아늑했지만 내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소리가 나서 또 엄청 신경이 쓰였다. 가만히 자지 못하는 나라서 더욱 그랬다. 덕분에 새벽 3시가 다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침대 커튼 사이로 장발 남성의 그림자가 보였다. 남자는 문가로 스윽 다가오더니 열쇠를 내밀며 "이거 쓰시면 되고요..."라고 말했다. 나는 처음엔 나에게 주는 건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내 뒤에 새로 온 손님에게 열쇠를 건네는 거였다. 열쇠를 받은 여자는 "아, 이게 키예요?"라고 말했다. 이 새벽에 들어온 손님이 있어서 신기하다고 생각한 순간, 여기는 전자식이라 열쇠가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여기는 여성 전용층이라 아무리 직원이어도 남성이 올리가 없지 않을까? 싶어졌다. 그 순간 남자 직원은 사라졌고 주변은 고요해졌다. 이게 꿈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비몽사몽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방에는 여전히 나와 다른 손님 단 둘인 걸 보면 꿈이었던 모양이다. 정말 생생했는데 조금 무서우면서도 신기했다.

그리고 대망의 토요일. 송광사 투어는 운행하지 않았지만 쏘카를 대여한 분과 함께 편하게 송광사에 갈 수 있었다. 송광사는 진짜 너무 예뻤고 너무 더웠다. 더운 여행은 베트남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직사광선이 두피로 내리쬐는 더위가 있었다. 9월 중순인데 왜 체감온도가 32도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역시 엄마 말 듣고 단풍이 예쁠 때 올 걸 내가 왜 지금...이라는 후회가 살짝 들었지만 덕분에 사진은 정말 쨍하게 잘 나왔다. 탕웨이와 박해일이 나란히 서있던 북은 생각보다 작아서 감자칩 봉지를 뜯었을 때와 비슷한 배신감을 느꼈다. 박찬욱 감독님은 그냥 삼성동 봉은사 같은 곳에서 영화 찍으시지 왜 송광사까지 오신 걸까 싶어서 조금 미워지려고 했지만 그래도 보고 싶던 장소를 실제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의미 있었다.

여행은 최소 4주 전에 계획하는 나로서는 굉장히 즉흥적인 여행이었다. 지금 아니면 못 갈 거 같아서 날씨가 더워도 억지를 부렸는데 덕분에 새로운 경험도 많이 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가게 된다면 무조건 가을에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