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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1

어느 순간부터 남자는 가끔씩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뿌옇다고 하기는 애매하고, 그림자나 잔상 같은 게 상대방의 얼굴 속에서 비쳐 보였다. 난시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안과에서도 별다른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다.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삶에 큰 지장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살았다.

얼굴의 잔상은 컨디션이 안 좋거나 몸이 아플 때 더 자주 보였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미대 수업이 끝나면 헬스장으로 향했다. 각종 영양제를 챙겨 먹고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저절로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남자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한 날, 잔상은 이제 더 이상 잔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또렷해졌다. 상대방의 얼굴에서 현재의 얼굴, 그리고 과거의 모습이 동시에 보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한 번은 현재, 한 번은 과거의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다. 과거의 시점도 굉장히 다양했는데 교수님의 얼굴에서는 5살 때 모습을, 동기의 얼굴에서는 중학생 때 얼굴을 보기도 했다.

속수무책으로 보이는 얼굴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병원을 전전할 때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다행인 건, 남자가 낙천적인 성격이라는 점이었다. 남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능력을 발전시켜 보기로 결심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남자는 자기가 원할 때만, 원하는 시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한 얼굴에서 두 개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통제 가능하게 된 이 능력은 남자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여성의 화장 전 얼굴을 볼 수 있기도 했고, 잘생겨서 인기 많은 동기의 성형 전 얼굴을 알려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부모님의 어린 시절, 연애 시절, 결혼 후 모습을 볼 때마다 남자의 마음은 뭉클해졌다.

남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 시작은 소소하게 캐리커쳐였다. '과거를 그리는 캐리커쳐'는 소름돋게 높은 싱크로율로 입소문을 탔다. 소셜미디어에 오른 영상은 다양한 곳에서 재생산됐다. 여기저기 방송에도 많이 출연했다. 그는 유명해졌다. 그의 소식을 들은 경찰에서는 장기 미제 사건에 그의 도움을 요청했다. 현재 용의자의 얼굴을 보고 과거 범인의 몽타주와 대조하는 일이었다. 그의 능력은 탁월했고 덕분에 많은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그러다 그 사건이 일어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