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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지난주에 원장님이 휴가셔서 오랜만에 운동을 했더니 잠시 요단강이 보였다. 아무리 무게를 많이 올려도 어지러운 적은 없었는데 숨이 가쁘고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의자에 앉아서 거친 숨을 몇 분 동안 내쉬었더니 정상으로 돌아왔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차마 버스를 타기엔 너무나 민폐인 몰골이었고, 또 다행히 엄청나게 퍼붓던 소나기도 그쳤길래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밤 9시가 훌쩍 넘긴 시간이라 도보가 어두웠지만 말랑말랑 감성 터지는 멋진 곡들을 들으며 느긋하게 걸었더니 굉장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 분위기에 취한다' 싶었던 찰나, 땅 위로 올라온 세 마리의 지렁이를 보았다. 가까이 딱 붙어서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세 가족과 같은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 모르겠고 너무 징그러웠다. 이제까지 지렁이는 신경도 안 쓰고 즐겁게 걷고 있었는데 지렁이 세 마리를 보고 난 이후로는 바닥의 모든 나뭇가지도 지렁이로 보이고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하필 또 강풍을 동반한 소나기가 막 지나갔던 참이라 바닥에 나뭇잎과 나뭇가지도 오지게 많았다. 흡사 지뢰밭을 걷는 심정으로 내가 지렁이의 삶을 파괴하진 않을지 조심하면서 바닥만 보고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새삼스럽지만 늘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가 떠오른다. 모든 건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가르침은 변함없이 진리처럼 느껴진다. 마음가짐 하나로 모든 게 변할 수 있는데 그게 말로는 참 쉬운데 실제로는 참 어렵다. 어려워서 삶은 늘 배우는 과정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