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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스포 있음)

다 보기까지 거의 4년이 걸렸다. 4년 전에 초반 5분 보고 잠든 후 이달 초 집중해서 중반을 보다가 드디어 오늘에서야 엔딩을 보았다. '지브리의 첫사랑' 같은 문구로 홍보하던데 확실히 주인공들의 풋풋한 연애를 보는 매력이 있다. 정확히는 연애가 아니라 썸이겠지만, 연애 시작 전 간질간질한 그 마음이 느껴졌다. 이제는 간접 경험이라고 하기에도 좀 뭐 하고, 그저 할머니가 유치원생 손주들의 재롱을 보는... 그런 마음으로 봤다.

 엔딩에서 소년이 소녀에게 "나중에 나와 결혼해 줘!"라고 고백하고, 소녀는 수줍은 표정으로 볼을 물들이며 "좋아."라고 답한다. 그런 소녀의 모습을 본 소년이 "좋아해!"라고 외치며 소녀를 와락 끌어안는다. 귀엽고 풋풋한 엔딩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막 중학생인 그들을 보며 이 둘이 과연 결혼까지 이르는 과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소년은 고등학생이 되면 진학 대신 이탈리아의 바이올린을 만드는 장인 밑에서 수련을 할 계획이다. 얼마가 걸릴지는 모른다. 소녀는 동네의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4년 내외의 시간이 흐른다. 소년은 여전히 이탈리아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 소녀는 일본의 대학에 진학한다. 글을 쓰는 데 재능이 있었으니 아마 문학과 관련된 과에 진학했을 거다. 그때까지 이 둘이 풋풋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롱디 커플이 된다. 90년대 영화니까 보이스톡이나 페이스톡은 전무하다. 다행히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메일로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는다. 서로가 만날 수 있는 날은 많아야 1년에 한 번 남짓이다.

20대 중반이 되었다. 소녀는 취업을 한다. 소년은 귀국했다면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것이다. 둘은 좀 더 자주 본다. 이제 소년이 귀국하여 정착했으니 부모님께 서로를 소개한다. 다행히 소년의 할아버지와 소녀는 친분이 있다. 할아버지의 허락으로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서로의 부모님을 만날 때 꽃다발과 과일을 사 간다. 정갈한 일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결혼을 허락받고, 둘은 함께 살 집을 알아본다. 상견례 날, 두 사람의 집 가운데 있는 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먹으며 다시 한번 결혼 진행 의사를 피력한다. 둘은 살림을 마련하고 식장도 예약하고 청첩장도 찍고 이것저것 기타 등등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결혼에 이른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랑 결혼해 줘!/좋아!' 이게 현실에서는 엔딩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엔딩에는 그 행복을 위해 무수히 노력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어떤 엔딩은 시작이 된다. 오늘, 또 하나의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