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때 학교에서 마련한 취업 캠프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2박 3일 동안 합숙하며 면접 특강, 조별 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했다. 당시 우리 방에는 최 씨 성을 가진 여자 셋이 배정되었다. 이름 가나다 순으로 방을 배정한 게 틀림없었다. 우연히 최 씨들은 셋 다 모두 동갑이었다. 초면이었지만 동갑에 같은 성씨, 그리고 취준생이라는 배경 덕분에 빠르게 친해지기는 개뿔, 어차피 2박만 하고 말 사이니까 서로 어색하게 웃으며 거리를 두고 지냈다.
둘째 날 아침, 룸메이트 중 한 사람이 내게 뷰러가 있냐고 물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두 최씨 중 한 명은 매우 화려했고 다른 한 명은 매우 수수했다. 뷰러를 물어본 사람은 화려한 쪽이었다. 나에게는 엠케이가 선물해 준 시세이도 뷰러가 있었다. 3년째 쓰고 있었지만 매우 소중하게 다루는 물건이었다. 당시의 나는 물건 빌려주는 일에 매우 민감했다. 초면에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쨌든 있으니까 빌려줬다. 잠시 후 잘 썼다며 돌려준 뷰러에는 그녀의 마스카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나는 여러가지로 너무 놀랐다. 일단 나는 마스카라를 하기 전에 뷰러를 하는 타입이라, 마스카라 후에 뷰러를 쓴다는 점에서 놀랐다. 나중에서야 고정을 강하기 위해 이렇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당시에는 몰랐다. 순서보다 더 놀란 건 깨끗한 뷰러를 빌려갔다가 더럽게 돌러준다는 점이었다. 아니, 순서야 뭐 자기 맘대로 쓸 수 있겠지만 닦아서 주는 게 상식 아닌가? 어떻게 이 상태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을 하는 건지 충격을 받았다. "저기요, 이거 너무 더럽게 쓰셨는데 닦아서 돌려주실래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분노하며 말없이 뷰러를 벅벅 닦았다.
다음날도 여자는 뷰러를 빌려달라고 했다. "어제 너무 더럽게 쓰셔서 안 빌려드리고 싶은데요" 라고 말할 용기 역시 없었다. 진짜 싫었는데 억지로 빌려줬다. 역시나 뷰러는 마스카라 범벅이 되어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거 그거 같은데, 중고등학교 때 일진이 체육복 빌려달라고 하는 거. 싫은데 억지로 빌려줬더니 엄청 더럽게 돌아오거나, 아예 돌아오지 않는 그런 거. 나는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벌써 오래 전 일인데 아주 가끔 생각난다. 그 여자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아마 아무 생각도 없었겠지? 취업은 잘했을까, 거기서도 상사한테 물건 빌려서 더럽게 돌려줄까. 결혼은 했을까, 아이는 낳았을까. 집 청소는 잘하고 있을까.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최 씨 여성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