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화장실

어제는 퇴근길 지하철에 발 디딜 틈이 없어서 한 대를 그냥 보냈다. 덕분에 글쓰기 수업에 지각했다. 첫 번째 시간이 끝나고 화장실에 갔는데 오른쪽 맨 구석 칸에 사람이 있었다. 화장실에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한 거지만 좀 이상했다. 왜냐하면 강의를 듣는 건물의 화장실은 사람이 있을 때만 불이 켜지는 시스템이라, 내가 들어가기 전까지 불이 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불 꺼진 화장실 안에 있는 사람, 그리고 그 문이 닫힌 칸에서는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는 소리가 나다가 내가 들어가니까 조용해졌다. 그냥 좀, 사실은 많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시간이 끝나고 다시 화장실에 갔는데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불이 꺼진 화장실, 아까와 같은 위치에 문이 닫힌 칸, 사람이 들어오자 사라지는 인기척. 너무 이상해서 다른 수강생 분에게 상황을 말했다. 그러자 다들 그 문 닫힌 칸이 이상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상하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머리를 굴리다가 '가출 청소년'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수업을 듣는 건물엔 도서관과 자습실이 있어서 청소년이 많이 오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시간이 끝나고 설마 아직도 있을까 싶어서 우르르 화장실에 갔더니 아직도 그 칸은 그대로 문이 닫혀 있었다. 건물은 밤 10시가 되면 자동으로 문이 닫힌다. 가출 청소년이어도 나가야 한다고 말은 해주려고 칸 문을 똑똑, 두드리자 신경질적인 딱! 하는 소리가 났다. 내가 조심스럽게 "저, 여기 10시면 문을 닫아서요..."라고 말하자 안에서 대답했다. "아, 예. 나갈게요." 여기서 반전, 안에서 들린 건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3시간 넘게 여자화장실 구석 칸에 있던 사람은 남자였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식겁했다. 우리는 이걸 어쩌나 싶어서 황급히 화장실을 빠져나와서 어쩔 줄 몰랐다. 그 사이 남성은 유유히 나와서 수강생들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무렇지 않게 1층 출구를 통해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나도 화장실을 나온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쳤지만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서 나와요? 거기서 뭐 하셨어요?" 똑 부러지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건물 관리실로 달려가 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담당 직원의 대응이 무척 아쉬웠다. "이미 갔고... 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너무 빡쳐서 "지금 이 사건의 문제는 시에서 운영하는 기관의 여자화장실에 남자가 2시간 넘게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거고, 그게 어떤 범죄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거예요."라고 말하자 그제야 직원은 CCTV를 돌려 남성의 영상을 찾았다. 나는 몰랐는데 다른 수강생 분이 최근 지하철 범죄도 범인이 여자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저지른 거라고 해서 정말 무서워졌다. 또 찾다 보니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 자체로 범죄 행위가 성립하는 거였다. 관리실 직원은 오늘 회의 후 경찰에 신고할지 어떻게 처리할지 내일 피드백을 준다고 했다.

이 일이 있고 지금까지 틈이 날 때마다 그 남자는 왜 여자화장실에 3시간 넘게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는데 전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 남자와 나, 단 둘이 화장실에 있던 시간도 있었는데 그때 만약 그 남자가 나왔다면... 너무 무섭다. 원래 화장실은 밖에서 유일하게 마음 편한 공간이었는데, 이제 밖에서는 맘 편하게 화장실도 못 가게 되었다. 무서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