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를 받고서야 깨닫는다. 아, 내가 최근 스트레스가 없었구나. 좋을 땐 모르고 안 좋을 때가 되어서야 '그때 참 좋았군'이라고 깨닫는다. 전에 만만하게 보이더라도 착한 사람으로 일하고 싶다고 썼는데 약간 번복하고 싶어 진다.
어제는 사내에서 심야 촬영이 있었다. 유리에 촬영 스태프가 반사되지 않도록 내부 불을 꺼달라는데 스위치의 위치를 몰랐다. 불 끄고 찍는 줄도 몰랐고 나는 해당 층에 근무하지도 않으니 스위치의 위치를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나만 바라봤다. 나는 밤 9시에 총무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총무팀도 모른다며 설비팀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알려준 설비팀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해당 담당자도 당연히 퇴근했단다. 그래서 설비팀 위치를 알려달라고 해서 다른 동료를 해당 위치로 보냈다. "설비팀에서 꺼주신대요~"라고 했으나 기다려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내가 직접 설비팀을 찾아갔더니 그럼 전기팀 직원을 보내준다고 했다. 사람들은 불을 꺼야 조명 세팅을 하는데 대체 언제 꺼지냐고 나를 독촉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올라온 전기팀 직원은 여기저기 전화하더니 이쪽은 개별 회사의 영역이라 자신들의 관할이 아니기에 시스템으로 불을 끌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연출팀에서는 전구를 하나하나 직접 돌려 빼서 불을 끄고자 했는데 일단 전구가 오지게 많았고 또 전구는 돌려지지도 않았다. 연출팀은 한숨을 쉬며 전등을 절연 테이프로 손수 봉인하기 시작했다. 12시 전에는 무조건 끝내야 하는 촬영은 이미 1시간 이상 딜레이가 되며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눈으로 절연테이프가 덕지덕지 발리는 모습을 바라보다 반대편 사무실의 불을 끄기 위해 스위치를 조작하던 중 불현듯 같은 위치에 스위치가 있지 않을까 싶어 다시 돌아갔더니 세상에... 아무도 모르던 스위치가 거기 있었다. 한 오 분만 빨리 깨달았어도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너무 늦었다. 테이프를 붙이던 연출팀은 꺼져서 다행이긴 한데 이게 뭘까 싶은 표정으로 또 나를 봤다.
여기까지가 1차 멘탈 탈곡이었고 이후 또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중에 또 보고 빡치고 싶지 않아서 아껴둔다. 출연자도, 만드는 사람도, 제작사도, 클라이언트였던 나까지 그 어느 누구도 즐겁지 않은 촬영이었다. 늘 클라이언트가 되고 싶었는데 클라이언트라도 개처럼 일하고 제작사에게 모질게 대해질 수 있다는 걸 배운 소중한 시간이었다. 담엔 제발 미리미리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