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꾼 꿈에는 비둘기가 나왔다. 한 마리가 아니었고 살아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어딘가에 짓눌려 죽은 비둘기 사체들이 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 사이를 피해 걸어 다녔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찌부된 비둘기 사체라서 너무 무서웠다.
그 꿈을 꾸고 출근하는 길에 갑자기 새하얀 비둘기가 내 앞을 막았다. 우리 동네에 비둘기가 있었나 싶었던 신기함이 첫 번째였고 나한테 달려들까봐 무서운 게 두 번째였다. 내가 오른쪽으로 가면 비둘기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가서 나 가지 말라고 막는 걸까 싶을 만큼 적극적인 방어 태세였다. 가까스로 하얀 비둘기를 피해 길을 건너자 이번엔 오리지널 회색 비둘기가 내 앞에 나타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단지 안에서 비둘기를 본 적이 없었는데 비둘기 꿈을 꾸고 나서 비둘기 두 마리를 마주하니까 당황스러웠다.
어제는 사내 높으신 분에게 보고가 있었다. 멍 때리고 있다가 팀장님이 지금 얼른 보고하자고 하셔서 후다닥 들어갔다. 11시 8분에 보고를 시작했는데 30분에 점심 약속이 있으신지 보고받으시는 분이 연신 시계를 보셨다. 덕분에 뻘짓 일주일 제외하고 삼일 내내 만든 자료는 채 10분도 되지 않아 수명을 다했다.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이거 장표 누가 만든 거야? 안나가 만들었어? 안나는 못하는 게 없네"라는 말을 듣고 진짜 개뿌듯했다. 바로 직전에 팀장님에게 보고했다가 자료가 이게 뭐냐고 엄청난 욕을 먹었던 게 바로 지난주였기 때문이다. 간단히 팀장님께 아이데이션 보고하는 자리라고 생각해서 러프하게 만들었다가 혼난 후 이를 부득부득 갈고 각 잡고 제대로 만들었던 게 이거였다. 그래서 팀장님 보는 앞에서 칭찬받으니 굉장히 뿌듯했다.
...라고 어제 순진하게 좋아했는데, 오늘 오후 5시 넘어 갑자기 높으신 분이 본부 소개 자료 좀 만들어야 하는데 장표 만들 사람이 없다며 다음 주 화요일 오전, 다시 말해 월요일 밤까지 25분 분량의 PT에서 사용할 자료를 만들라고 했다. 내가 왜...? 왜 저죠...? 저는 본업이 따로 있는데요...? 열심히 일했더니 더 큰일이 돌아왔다. 어딘가에 찌부되어 피 흘리며 죽어있는 비둘기는 내 예지몽 아니었을까. 업무와 잡무에 찌부되어 피를 철철 흘리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