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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친구와 함께 졸업 후 처음으로 우리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방문했다. '학교에 가보자!'라는 얘기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정문에 도달하면 고교시절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아득하고 아련한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할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막상 학교에 도착한 우리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일단 학교로 향하던 길이 너무나 많이 바뀌어서 과거의 추억을 곱씹을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학교는 코로나라 외부인의 방문을 원천 차단했지만 멀리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학교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거의 없었다. 파노라마처럼 아름다운 추억은커녕, 백지같이 깨끗한 과거를 곱씹으며 우리는 어색하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친구는 말했다. "나는 앞으로 다시는 여기에 올 일이 없을 거란 걸 직감했어."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갔던 길을 걸으며 우리는 이미 착즙기에서 한번 짜낸 오렌지를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것처럼 애처롭게 추억을 짜냈다. 황폐한 마음으로 쓴 입맛을 다시며 골목을 걷다가 갈림길에 도달했다. "여기서 좌회전했던 거 같지 않아?" "지리 상으로는 더 가야 하는데, 저 앞쪽 길은 확실히 낯설어." "그럼 우리의 감을 믿어보자"

'감'에 기대어 좌회전을 해서 큰길로 나오니, 그곳에는 정말로 우리가 자주 다녔던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비록 주변은 많이 바뀌었어도, 추억은 잊혔더라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3년을 매일 다녔던 길과 발걸음은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나지 않는 과거들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의 내가 있고 우리가 있었다. 그러니까 잊히지더라도 괜찮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이 쌓여서 오늘의, 또 내일의 우리가 될 것이다.